상단영역

본문영역

농업박물관

농업박물관

  • 기자명 편집부
  • 입력 2023.10.14 20:59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업은 인류와 함께하는 생명산업

우리 선조들은 풍년농사를 위해 농토를 개간하고 과학적인 농기구들과 농사법을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곳간에 식량이 가득해야 마음이 편하고 나라도 부강했던 오천년 농경문화의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만큼 농업은 소중한 우리의 생명산업이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한국동란 이후 60년대 초반까지로 매년 춘궁기와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 타계한 허문회교수가 병에 강하고 일반 벼 품종보다 생산량이 약 40%나 많은 통일벼를 개발해냄으로써 식량 자급자족이라는 아시아의 녹색혁명을 이뤘다.

그러나 지금도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량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데, 향후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의 식량대란을 점치는 미래학자들의 예고를 그냥 안일하게 넘길 일은 아니다. 보다 과학적인 식량생산 정책이 요구되고 있다.

이토록 중요한 농업과 농경문화의 과거와 현재를 도시민들과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1987년 농업협동조합중앙회가 농업박물관을 설립하였고, 20057월 전시장을 새롭게 리모델링하여 문을 열었다. 농경문화연구와 농경유물 발굴, 보존에 노력하여 현재 5천여 점의 농경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연면적 3천여 평방미터에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영상실, 체험실 등을 갖추고 있다.

1층의 농업역사관은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농업발달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유물, 영상을 비롯해서 주요 농경유적의 축소모형을 통하여 각 시대별 농경문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전시실에서 농업사 연표를 보면, 기원전 1만년 경 ~ 1천년 경에 이르는 신석기시대에는 가축을 키우고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직접 생산하였으며 물과 먹을 것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오곡농사를 시작한 때는 청동기시대인 기원전 700년 경이라고 추측하고 있는 데 이 무렵의 탄화된 쌀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선사시대의 농기구는 주로 돌이나 나무가 되겠지만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마제석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동기시대의 농기구인 따비는 대형화된 농기구로서 이 시기에는 아주 과학화된 농기구로 농사생활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당시의 따비는 조선기대의 따비와 비교해 봐도 형태면이나 크기도 별 차이가 없을 정도다.

청동기시대의 논 유적에서는 주변의 작은 하천을 막아 보를 설치하여 관개시설을 만든 흔적이 보이며 보를 통해 수로로 흘러들어온 물을 다시 논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로와 논 사이의 둑에는 물꼬가 만들어져 있고 가장 높은 논으로 들어온 물이 점차적으로 낮은 논으로 흘러들어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로 제작된 농기구가 등장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이며 철제공구의 사용으로 많은 농기구를 쉽게 만들게 되었고 농업생산력도 증대되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는 철제 따비와 괭이, 쇠낫 등 철제농기구를 이용하고 물을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논농사가 넓은 평야지와 골짜기로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4세기경인 삼국시대에는 소를 이용한 논갈이와 밭갈이가 이루어지고 철제기구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수리시설을 정비하였다. 현재 사적 제111호인 김제 벽골제(碧骨堤)는 한국 최고, 최대의 저수지 둑으로 백제 비류왕 27(330)에 쌓았고, 원성왕(790)때 증축되었다.

대규모의 수리시설 개발과 우경농사가 시작되면서 논농사가 더욱 활발해지고 고려시대에는 산골짜기의 계곡을 따라 논밭을 만드는 등 국가차원에서 토지 개간을 권장하였다. 조선시대의 권농정책은 '나라의 근본이 농업'이라는 점이 강조되어 1429년에 고유의 농업기술을 정리한 첫 농사서인 농사직설을 비롯하여 유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농서가 편찬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작물을 경작하는 과정에서도 과학영농기술을 활용하여 각 작물마다 많은 품종을 개발하였고, 종자를 처리하는 기술도 발전시켰다. 기경법, 시비법, 수리기술, 경작방식 등도 지역에 따른 농업환경을 고려하여 개발하였다.

15세기경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산가요록'동절양채'편에서는 겨울철에 신선한 채소를 재배하는 방법으로 난방시설을 갖춘 온실을 짓고 재배관리요령에 대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는 그동안 세계 최초로 인정받았던 1619년 독일의 온실보다 170여년이나 앞선 조선의 온실농업으로 우리 조상의 지혜로운 농업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근현대 농경의 모습을 소개하는 전시관에서는 농업의 발전사를 기록과 영상으로 보여주고 그리고 농기구도 진열되어 있다. 1945년 해방 당시엔 전체 인구의 77%가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식량이 부족하여 초근목피로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1960년대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농업인구가 줄었으나 육종을 통한 신품종개발을 통해 통일벼를 생산하게 되고 1977년 이후부터는 쌀보리를 자급자족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인력 중심의 농업이었다면 70년대 이후에는 각종 농기계의 보급과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기계농업과 함께 인터넷을 이용한 농산물 판매가 이루어졌다. 또한 유전공학과 바이오산업이 발달하여 종자의 품종개량 등 첨단농업으로 특화농업분야가 활발해졌다.

2층의 농업생활관은 100여 년 전의 옛 농촌들판 풍경과 농경민속, 농가주택, 전통장터의 모습을 통하여 농부들의 생활양식과 농경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시장이다. 농촌의 들녘 모습을 사계절별로 파노라마처럼 꾸며놓은 초대형 전시시설 앞에서는 농악소리가 울려나올 듯하고 저 멀리 논둑길에 새참을 이고 오는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부족하여 제때 모내기를 하지 못하거나 벼를 베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협력하여 공동작업을 하기위해 마을의 공동조직으로 두레를 만들었다. 주로 두레 회원은 장정들이었고 이웃끼리 하는 품앗이에는 여자나 어린아이도 참여했다.

어렸을 때 이웃집과 날짜를 달리하여 모내기를 할 때에 품앗이로 참여하여 못줄을 잡아주거나 모판을 나르고 모를 심었다. 거머리가 달라붙지 못하도록 낡은 스타킹을 신고 일해도 악착같이 달라붙는 거머리 때문에 피를 보게 되고 그 자리가 간지러워서 발과 발로 비벼댔던 기억들이 새롭다.

농촌에는 마을 입구나 낮은 동산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자리한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그 나무에 동제를 지낸다. 마을 주민들의 무병과 풍년을 빌기 위해 드리는 마을 공동제사다. 동제는 대부분 음력 대보름날 지내는 데,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묶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1970년대 경제개발정책이 서구화를 부르면서 우리의 민속신앙이 미신이라는 부적정인 인식으로 낙인찍히면서 점점 사라지고 공동체가 무너지고 핵가족화 되고 있다. 오늘날 농촌은 인구가 점점 줄어 농사지을 사람조차 부족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 전통농가의 삶을 모형으로 꾸며놓은 공간에는 안채와 사랑채, 방앗간 등이 있다. 일반적인 농가는 부엌, 안방, 건넌방 등을 갖추고 지붕에 짚이나 새, 띠풀 등으로 만든 이엉을 덮었다. 부엌과 건넌방 사이에 위치한 안방은 안주인을 포함한 가족들의 일상적 거처로 안주인의 바느질, 다듬이질, 옷감짜기 등 가사노동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건넌방은 바깥주인의 차지로 겨울철에는 새끼 꼬기, 가마니 짜기, 자리 짜기, 멍석 엮기 등 가내수공업의 작업장으로 활용되었다.

전통장터 전경은 농업박물관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이다. 농가에서 생산된 농축산물과 생필품들이 거래되는 곳으로 생선가게, 쌀가게, 옹기그릇, 방자유기, 면직물 판매소, 철물점, 엿장수, 주막집 등등을 둘러볼 수 있다. 오늘날에도 시골에 가면 5일장이 서는 데 15세기 후반에 농업이 발달하고 농촌 사회의 분업이 촉진되면서 장이 서게 되었다.

전라, 경상, 충청도 지방에서 먼저 생겼으며 12~16km 간격을 두고 5일마다 열렸다. 고을마다 5~6곳의 장이 다른 날짜에 정기적으로 열렸으므로 각 고을에 장이 서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장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을 장돌뱅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농촌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기도 했지만, 사람 간에 만나고 지역 간에 정보를 교환하는 문화교류와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농업박물관 지하 1층에는 농협의 역사와 사업을 소개하고 우리 농업의 우수함과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농협 홍보관으로 꾸며져 있다. 1961년 출범한 농협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다양한 고품질의 쌀, 세계적인 각광을 받고 있는 김치의 종류, 축산물에 대한 다양한 정보, 기타 세계에 수출되고 있는 농협식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농업, 나아가 세계의 농업은 인류의 생명을 지키는 산업일 뿐만 아니라, 지구의 환경을 지키는 파수꾼이기도 하다. 농업은 홍수예방, 수질 및 대기 정화, 토양 유실방지 등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인류가 처음 터득한 농업은 마지막까지 인류를 지켜줄 산업이다.

 

농업박물관 이용안내

지하철로 오시는 길은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하차하여 광화문 방향의 농협중앙회 건물과 함께 있음.

서울 버스 파랑 160, 260, 270, 271, 초록 7019, 빨강 9701, 9709번을 타고 농협중앙회에서 하차

농업박물관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 175번지

전화 : 02) 2080-5727~8, 홈페이지 : www. agrimuseum.or.kr

 

한국 건설산업의 리더 --> www.dailycons.co.kr

일간건설은 건설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건설업계의 최신 동향과 정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간건설은 건설업계의 발전과 성장에 기여하고 있으며, 한국건설업계의 리더십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건설전문지 입니다.
일간건설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3년 언론사 종합평가에서 종합 13위, 건설 1위를 차지하며, 건설 전문 언론사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일간건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안내 기사의 수정 및 삭제는 정기구독자 에게만 서비스 합니다

국회일보사 구독자 여러분께 유료화 전환에 대한 안내

한국건설 산의의 리더 일간건설은 그동안 모든 컨텐츠를 무료로 개방해 왔습니다만 오늘부터는 경영합리화의 일환으로 모든 컨텐츠는 유료로 전환 됨을 알려 드립니다.

국회신문사는 신속하고 정확한 기사 제공으로 고품질의 독자여러분의 성원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원에 가입하는 독자에게는 정가에서 20%에서 270%까지 활인하는 특전을 제공하며 1년 정기구독자는 카드 결재가 가능하며, 2년에서 3년 장기 구독자는 통장입금이나 가상계좌를 통해 결재 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기사는 기사량의 30%에서 50%만 노출됨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추가로 기사를 확인하시려면 회원가입 후에 매체별 연도별로 체크해주시고 구독신청하시고 결재가 확인 되시면 즉시 구독하실 수 있습니다.

회원가입 바로가기
건설업계 뉴스 포커스

하단영역

ND소프트